불상들은 왜 그렇게 다르게 생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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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khard Pemsl의 사진 |
불교가 고타마 싯다르타의 출생지인 오늘날의 네팔에서 불교가 아시아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다양한 민족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할 수 있도록 경전이 지역 언어로 번역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불교 미술과 이미지 또한 지역 예술 양식으로 "번역"되었을까요? 그렇습니다. 아래 다양한 양식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부처님 묘사 방식의 변화는 다양한 예술 양식, 지역 문화, 그리고 불교 신앙의 진화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석재, 사암, 화강암, 구리, 목재 등 재료의 차이 외에도,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의 다섯 불상들은 양식적인 차이 뿐만 아니라 문화 간, 심지어 종교 간의 경계마저도 넘어서는 다양성을 보여줍니. 다양하게 변형된 싯다르타의 이미지는 각 지역의 중생들이 깨달음의 길을 걷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부처, 보살, 스승, 산속의 수행자, 심지어 유교 관료와 같은 새로운 정체성들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간다라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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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간다라 양식의 이 입상은 싯다르타의 초기 인간 형상 중 하나입니다. 이전에는 수레바퀴나 발자국과 같은 상징으로만 표현되었습니다. |
이 입상 불상은 싯다르타의 가장 초기 모습 중 하나입니다. 이 불상은 싯다르타를 깨달은 자로 묘사하고 있으며, 승복(상가티)을 입고 있고 왼손으로 그 옷자락을 쥐고 있습니다. 머리의 상투(우쉬니샤), 이마 위에 점처럼 뭉친 머리카락(우르나), 길게 늘어진 귓불은 이 인물이 부처임을 식별하게 해주는 특징입니다. 떨어져 나간 오른손은 아마도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무드라(수인)를 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장신구가 없는 외형은 싯다르타가 왕족 신분과 세속의 재산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싯다르타를 인간의 형태로 묘사하는 것은 서기 1세기에 등장한 새로운 경향이었습니다. 이는 싯다르타의 존재를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하지 않고 깨달음을 상징하는 보리수 나무, 가르침을 상징하는 법륜(수레바퀴) 등의 은유적 상징으로 대신해 표현했던 기존 인도 전통 미술과는 매우 다른 방향성이었습니다.
이러한 예술적 변화는 쿠샨 왕조(30~375년)의 건국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쿠샨 제국의 수도는 간다라(오늘날의 파키스탄 북부) 지역의 베그람이었습니다. 간다라는 기원전 330년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가 정복한 동쪽 끝 지역이었기에, 프랑스 학자 알프레드 푸셰는 1905년 이 불상의 인체 형상이 그리스(헬레니즘) 예술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하며, 이 경향을 ‘그레코-불교 미술(Greco-Buddhist art)’이라고 불렀습니다. 유럽인처럼 오뚝한 콧대, 물결치는 머리카락, 콧수염 등의 특징을 가진 부처의 얼굴 생김새, 몸무게를 한쪽 다리에 싣고 다른 다리를 편안히 둔 콘트라포스토 자세, 토가처럼 보이는 승복 등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서양 기원설은 동양 학자들에게 호응을 얻지 못했습니다. 1927년, 아난다 쿠마라스와미는 인간 형상의 부처 이미지가 인도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쿠샨 왕조의 제2의 수도인 인도 북부의 마투라 지역 조각에 주목했습니다. 마투라는 쿠샨 이전부터 잘 정립된 예술 중심지였습니다.
마투라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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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북인도 마투라 양식으로 사암에 조각된, 다소 위협적인 불상. 카트라 보살. 쿠샨 왕조, 서기 2세기 / 인도 마투라 정부 박물관 / 비스와룹 강굴리 작품 |
카트라 유적에서 출토된 좌불상은 마투라 조각 양식을 잘 보여줍니다. 현지에서 채굴한 붉은 사암으로 조각된 이 불상은 둥근 얼굴과 풍만하고 다부진 상체 등으로 활기찬 분위기를 풍기며, 이는 기원전 322년부터 185년까지 이어진 마우리아 왕조 미술로 거슬러 올라가는 마투라 특유의 강건한 미학을 반영합니다. 마투라 불상의 젊고 생기 있는 모습은 간다라 불상의 조용하고 절제된 분위기와 대조를 이룹니다.
도상학적으로 이 상은 부처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장신구 없이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무드라(手印, 수인)를 취하고 있고, 손바닥과 발바닥에는 부처를 상징하는 법륜 문양이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시주자가 좌대에 새긴 명문에 따르면, 이 상은 보살을 묘사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는 불교 도상학이 아직 발전 중이었음을 반영하거나, 싯다르타를 부처가 아닌 보살로 인식하려는 지역적 경향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태국 테라와다 양식
불교 수행자들 사이의 분열로 인해 불교에는 테라와다(소승 불교,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라는 두 주요 종파가 형성되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는 전통은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전역에 걸쳐 확산되었으며, 개인의 출가 수행을 통한 깨달음을 강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싯다르타는 보살보다는 승려로서 더 많은 이미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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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태국에서 제작된 이 동상은 부처님이 법을 설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상좌부 불교를 반영하여, 부처님은 승려의 가사를 입고 있습니다. 설법하는 부처님. 8세기, 태국 북동부 /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
예술적으로, 테라와다 불상들은 인도 굽타 왕조(320~500년경)의 조각 양식을 계승했는데, 이 시기에는 인간 부처인 석가모니가 더욱 신적인 존재로 다듬어졌습니다. 태국에서 제작된 구리 불상 '설법하는 부처'는 굽타 양식을 모방한 지역 작가들의 의도를 잘 보여줍니다. 평온한 얼굴, 단정하게 정돈된 머리칼, 넓지만 부드러운 어깨, 잘록한 허리, 곧게 뻗은 다리, 그리고 거의 투명하게 표현된 부드러운 승복이 특징입니다.
이 불상에서 특이한 지역적 특징은 손 모양에서 발견됩니다. 엄지와 검지를 연결해 고리를 만들고, 양손을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린 이 수인은 비타르카 무드라(설법 인, 교법륜)로, 오른손을 들고 왼손은 무릎에 얹는 비대칭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인도의 원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양손을 평행하고 대칭적인 자세로 들어올리는 이 버전은 오늘날 태국 중부 지역에 위치했던 몬족 드바라바티 왕국 특유의 표현입니다. 비타르카 무드라는 부처님께서 첫 설법을 하실 때 '초전법륜을 굴렸다'는 것을 뜻하는 상징으로, 이 손동작은 이후 일본의 아미타불상에서도 등장합니다.
중국 대승불교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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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부처는 종종 지역 문화 및 종교와 연결되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6세기 중국 불상은 유교 스승의 가사를 입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불, 약 520년경 / 사진: Gary Todd, flickr.com |
동아시아에서 대승불교를 처음으로 국교로 채택한 정권은 중국의 북위(386~535)였습니다. 용문 석굴의 빈양동에 조성된 석조 석가모니 불상은 인도 미술이 중국화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선무제는 부모에 대한 유교적 효심에서 이 동굴 조성을 명령했고, 그의 아들인 헌명제가 534년에 완공하였습니다.
사자좌에 앉은 이 부처상은 도상적으로는 마투라 양식의 불상과 유사하지만, 전체적인 외양은 다릅니다. 비대한 체구와 뻣뻣한 자세의 빈양 불상과 협시 보살들은 유교 관료의 공식 예복을 입고 있습니다. 이 석가모니는 보다 넓은 중국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 유교적 스승의 모습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선불교 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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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선불교는 수행과 자기 수양을 중시하는 일본 엘리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이 조각상은 싯다르타가 방종과 자기 부정의 중간 지점을 발견하고 깨달음을 얻기 전, 고행 시기를 보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4세기, 싯다르타 하산 / 일본 나라 국립박물관 소장 |
대승불교는 점차 다양한 갈래로 나뉘었고, 그 가운데 선불교(중국에서는 '찬(禪)', 일본에서는 '젠')는 일본 가마쿠라 및 교토의 무사 계층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선불교는 수행과 자기 절제에 중점을 두었고, 이는 무사들의 가치관과 맞아떨어졌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선불교 수행자들은 깨달음을 '목표'가 아니라 '과정'으로 보았습니다.
후쿠조지(福蔵寺, 복장사) 사찰의 ‘산에서 내려오는 싯다르타’는 부처가 아니라 고난을 딛고 일어서는 인간으로서의 싯다르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형상은 금욕 수행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데서 오는 실망감을 표현한 것으로, 선불교에서 자주 다뤄지는 주제입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예술적 특징인 유리 장식 눈동자는 생동감을 나타내며, 움푹 꺼진 볼과 드러난 갈비뼈는 그의 고된 수행을 드러냅니다.
이처럼 수척하고 고행에 찌든 싯다르타의 모습은 쿠샨 왕조 시기부터 이미 존재했으며, 당시에도 명상하고 있는 해골 같은 형상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쿠샨 미술의 극사실주의적 표현은 싯다르타가 설한 '방종과 고행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중도'를 상기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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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불교 미술 전문가인 이쿠미 카미니시(Ikumi Kaminishi)는 미국 메사추세츠 주 보스턴 인근 메드퍼드 시에 위치한 터프츠(Tufts) 대학교에서 미술사 및 건축사 부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
- 출처 : 부처님은 왜 그렇게 다르게 생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