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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관련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블로그입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불교 관련 배틀 기록

궁궐에 유학자가 가득했던 조선시대, 조선의 왕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신하들과 불교 관련 논쟁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조선시대 왕들의 불교 관련 배틀 기록

궁궐에 유학자가 가득한 조선시대, 조선의 왕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신하들과 불교 관련 배틀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 : "전하, 불교를 폐지하시옵소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조선시대 왕들의 대답에는 그들의 캐릭터가 그대로 묻어나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 이단(李旦)

훌륭한 무장이었지만 학문이 조금 부족했던 태조는 논쟁을 할 때 비록 논리적 오류를 저질렀지만, 신하의 입을 막는데는 효과적인 반격을 가했습니다.

태조 : "이색도 불교를 믿었다, 네가 이색보다 잘났느냐?"
고려의 문하시중,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 이색(李穡, 1328년 6월 25일 ~ 1396년 6월 20일, 향년 67세). 익재 이제현 밑에서 공부했으며 성리학을 연구했고 문하에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남재, 권근, 길재, 이첨, 하륜, 윤소종, 염흥방 등 사실상 여말선초 거의 모든 사대부들을 키워 낸 인물로, 사대부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리학의 거두입니다.
태조실록2권, 태조 1년 윤12월 4일 경진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정총에게 《대장경》을 인간할 발원문을 짓게 하다 국역원문.원본 보기 첨서중추원사(僉書中樞院事) 정총(鄭摠)에게 명하여 《대장경(大藏經)》을 인출(印出)할 원문(願文)을 지어 올리게 하니, 정총이 아뢰었다.  "전하께서 어찌 불사(佛事)에 정성껏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믿지 마옵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이색(李穡)은 유학(儒學)의 종사(宗師)가 되었는데도 불교를 믿었으니, 만약 믿을 것이 못된다면 이색이 어찌 이를 믿었겠는가?"  정총이 대답하였다.  "이색은 세상에서 학식이 높은 선비가 되었는데도 남에게 비난을 받는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입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색이 도리어 그대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하지 말라."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 → 이경(李曔)

정종 : "불교의 원리는 자비인데, 자비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불교가 허망하다고 하는데, 내가 왕이 되기전에 귀신에 들린 사람을 본 적도 있다."

평생 무장으로 살았던 정종은 어리숙한 논리를 펼치다가 노련한 유학자인 하륜에게 말빨로 관광을 당해버렸습니다.

정종실록3권, 정종 2년 1월 10일 을해 2번째기사 1400년 명 건문(建文) 2년 경연에서 《통감촬요》를 강하다가 불교 및 유교에 대해 하윤과 문답하다 국역원문.원본 보기 경연(經筵)에 나아가서 《촬요(撮要)》를 강하다가, ‘서역(西域)에 신(神)이 있으니 그 이름은 부처[佛]라’고 한 데에 이르러서, 한참 있다가 말하기를,  "부처를 신(神)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지경연사(知經筵事) 하윤(河崙)이 대답하기를,  "오제(五帝)·삼왕(三王) 때에는 부처가 없었고,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에 이르러 그 경서(經書)가 비로소 전파되었는데, 그 도(道)가 적멸(寂滅)을 종지(宗旨)로 삼아서 귀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귀신의 도는 허(虛)라고 말할 수 없다. 과인(寡人)이 옛날에 위조(僞朝)에 벼슬하여 대언(代言)이 되어, 위주(僞主)001) 를 따라 장단(長湍)에 머물렀는데, 기생 5, 6명이 한꺼번에 복통(腹痛)이 났었다. 곧 술과 고기를 가지고 감악산(紺嶽山)에 제향하여 기도하였는데, 조금 있다가 신(神)이 한 기생에게 내려 전지도지(顚之倒之)하고 펄펄 뛰면서 부끄러운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이런 것은 헛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또 불씨(佛氏)는 자비 불살(慈悲不殺)로 도를 삼는데, 유자(儒者)의 도에도 또한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이치가 있으니, 이것은 비슷하다."  하였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유자의 도는 함부로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위로 종묘(宗廟)에 이바지하고 아래로 빈객을 권하는 것뿐입니다. 대저 서역(西域) 사람들이 모두 포악하고 무도하였기 때문에, 석씨(釋氏)가 자비 불살(慈悲不殺)로 달래고, 윤회 보응(輪回報應)으로 겁준 것이니, 인주(人主)의 믿을 바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  하고, 말하기를,  "석씨(釋氏)가 우협(右脅)에서 탄생하였다는데, 성인(聖人)이 어찌하여 쓰[書]지 않았는가? 사람이 죽으면 지옥(地獄)에 돌아간다는 것도 거짓인가?"  하였다. 하윤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매우 이치 없는 말입니다. 어찌 사람으로서 옆구리에서 난 자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인이 쓰지 않은 것입니다. 또 사람은 음양 오행(陰陽五行)의 기운을 받아서 태어나고, 죽으면 음양이 흩어져서 혼(魂)은 올라가고 백(魄)은 내려가는 것이니, 다시 무슨 물건이 있어 지옥으로 돌아가겠습니까? 이것은 불씨가 미래(未來)와 보지 못한 것으로 어리석은 백성을 유혹한 것이니, 인주가 믿을 것이 못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책 3권 1장 A면【국편영인본】 1책 161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사상-불교(佛敎) / 사상-유학(儒學) [註 001]위주(僞主) : 우왕(禑王).

태종(太宗) 이방원(李芳遠)

술수가 대단했던 태종은 관료들이나 유학자들이 모두 부담스러워 하는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이용하여 불교 관련 문답에서 교묘히 빠져나갔습니다.

태종 : "나도 불교가 허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니, 우리가 아주 탄압할 수는 없다."
태종실록34권, 태종 17년 11월 1일 임자 1번째기사 1417년 명 영락(永樂) 15년 예조에 불법에 관한 교지를 내리다 국역원문.원본 보기 예조(禮曹)에 교지(敎旨)를 내리었다.  "대개 들으니, 천하의 도(道)는 인(仁)뿐이다. 한(漢)나라 이래로 불법(佛法)이 중국에 들어온 것이 지금까지 1천여 년이 되었는데, 역대 제왕(帝王)이 혹은 존숭하여 믿은 이도 있었고, 혹은 훼방하여 배척한 이도 있었고, 또 믿지도 않고 훼방하지도 않아 그 하는 대로 내버려둔 이도 있었는데, 여러 사책(史冊)에 실려 있어서 지금 모두 상고할 수가 있다. 나는 화나 복을 두려워하거나 흠모하여 부처에게 아첨하는 자는 아니다. 즉위하던 처음에 일관(日官)이 헌언(獻言)하기를, ‘아무 절은 그대로 두어야 하고, 아무 절은 폐지하여야 합니다.’ 하므로, 그 말을 신용하여, 따라서 즉시 시행하였다. 내가 일찍이 생각하니, 불씨(佛氏)의 무리가 비록 이단(異端)이기는 하나 그 마음 쓰는 것을 캐어보면 자비(慈悲)가 종지(宗旨)가 되고, 또 이미 도첩(度牒)697) 을 주어 출가(出家)하여 입산(入山)하였으니, 국가의 일에 관계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만일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할 수 없지마는, 경외(京外)의 각사(各司)에서 매양 영선(營繕)하는 일이 있으면, 아울러 승도(僧徒)를 징용하여 이름은 ‘청중(請衆)698) ’이라고 하나 실상은 역사(役使)시키는 것이어서 도리어 평민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매우 불쌍하다. 이제부터 경외의 각 관사에서 만일 여전히 역사시키는 자가 있으면, 승인(僧人)들이 그 사유를 갖추어 서울에서는 예조(禮曹)에, 외방에서는 감사(監司)에게 일체 모두 진고(陳告)하여 엄하게 금리(禁理)를 행하여서 내가 백성을 어질게 사랑하는 뜻을 널리 알려라."  처음에 임금이 관리가 승도(僧徒)를 역사시키는 일에 말이 미치어,  "내가 불법을 존숭하고 믿어서 죄나 복을 두려워하거나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외방 각 관에서 만일 영선을 하고자 하면, 모두 ‘청승(請僧)’이라 하여 폐단없이 건립(建立)하는데, 실상은 어찌 청하였는가? 침요(侵擾)699) 하여 고역(苦役)시키기를 평민과 다름이 없으니 승도 또한 백성이다. 이미 모두 부모를 하직하고 애정을 끊고 중이 되었으니, 이렇게 역사시키는 것은 실로 미편하다. 별요(別窰)의 청승(請僧)이 기와를 굽는 것도 또한 이것과 같다. 금후로는 별요(別窰)의 일과 각 고을에서 청승하는 법을 계문하지 말라."  하니, 일을 아뢰는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가합니다."  하였으나, 홀로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金承霔)가 아뢰기를,  "신이 무재(武才)로써 늙었으나 그래도 보고 들은 것이 있습니다. 불씨(佛氏)는 마음을 맑게 하고 욕심을 적게 하는 것으로 종지(宗旨)를 삼는데, 지금 승도들은 여염(閭閻) 가운데 살면서 부녀와 잡처(雜處)하고 술 마시고 고기 먹는 등 못하는 짓이 없으며, 또 어리석은 백성을 꾀어서 제 도당을 늘리니, 신은 항상 다 베어서 그 무리를 없애고자 합니다."  하였었다. 임금이 웃으며,  "어떻게 다 벨 수가 있겠는가? 내가 이미 예조에 명하여 도첩(度牒)을 주어 출가(出家)하게 하고, 도첩이 없는 자는 머리를 길러 백성이 되게 하였으니, 그 무리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교지(敎旨)를 내리었다.  【태백산사고본】 15책 34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2책 191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재정-역(役) [註 697]도첩(度牒) : 조선조 초기에 불교를 억제하기 위하여 나라에서 중에게 발급한 일종의 신분증. 입적(入寂) 또는 환속(還俗)을 하면 도로 반납(返納)함. [註 698]청중(請衆) : 나라에서 역사(役事)를 일으킬 때 많은 중들을 청하여 일을 시키던 일. 중들이 토목 기술을 가졌던 때문이었음. 청승(請僧). [註 699]침요(侵擾) : 침노하여 소요을 일으킴.

세종대왕(世宗大王) 이도(李裪)

처음에는 불교를 배척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나이가 들면서 노골적으로 불교를 옹호했던 세종대왕은 신하들이 불교에 대해 굉장히 수준 높은 공부를 선행한 뒤에 매우 학구적인 토론 배틀을 뜨고자 했습니다.

세종 : "석가의 설교는 진위를 알 수 없는 것인데, 역대의 호걸스러운 임금들이 지금까지 불교를 다 없애지 못한 까닭은 무엇인가? 마음을 깨끗이 하고 탐욕을 적게 내는 것을 도로 삼는다는 것은 도와 비슷한 소리지만 바른 도는 배우지 않고 그른 도를 근본으로 내세우는 것은 옳지 않다. 그 교리란 이치에 가까운 듯하면서도 진리를 크게 어지럽히는 것이다."

불교에 한해서는 상당히 강하게 고집을 부렸던 세종대왕은 수준낮은 불교 폐지 청원은 대부분 무시하고 자신의 의지를 뚝심있게 관철하였습니다.

세종실록27권, 세종 7년 1월 16일 정해 1번째기사 1425년 명 홍희(洪熙) 1년 경연에 나아가 시강관 설순과 문답하다 국역원문.원본 보기 조회를 받고 경연에 나아갔다. 임금이 시강관(侍講官) 설순(偰循)에게 묻기를,  "너의 선조가 중국에 있을 때에 어디에서 살았으며, 어느 때에 벼슬하였느냐."  하니, 순이 대답하기를,  "신의 선조가 서번(西蕃) 회골(回骨) 땅에 살았사오며, 원(元)나라 태조(太祖) 때에 비로소 벼슬하였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묻기를,  "너의 숙부(叔父)는 나이 몇 살 때에 여기에 왔으며, 우리 나라의 언어를 알았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의 숙부 장수(長壽)는 나이 19세에, 미수(眉壽)는 나이 17세에 여기에 왔사오며, 언어는 대강 알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불씨(佛氏)가 천축(天竺)에 살았다는데, 어느 곳에 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천축도 역시 서방에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석가(釋迦)의 설교의 진위(眞僞)는 알 수 없는 것이로되, 역대의 영웅 호걸의 군주(君主)들이 지금까지도 능히 다 혁파하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그 청정(淸淨)과 과욕(寡慾)으로 도(道)를 삼는 것은 근사(近似)하나, 정도(正道)를 배우지 않고 비도(非道)로 종(宗)을 삼는 것은 그르다. 그 교가 더욱 이치에 가깝기 때문에 참된 것을 크게 어지럽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세조(世祖) 이유(李瑈)

터프가이 지망생이었던 세조. 실록에 기록된 바는 아니지만 야사 따르면 다음과 같이 쎈 척을 하였다고 합니다.

세조 : "칼을 가져와라, 내 저놈을 죽여 부처에게 사죄하겠다."
지중추(知中樞) 홍일동(洪逸童)은 인격이 우뚝하게 뛰어나고 성품이 천진(天眞)하며 겉치레를 꾸미지 아니하였다.
사부(詞賦)에 능하고 술을 많이 마셨는데 정신없이 취하면 풀잎으로 피리 소리를 내었는데, 소리가 비장(悲壯)하고 위엄이 있었다.
평상시에 혼자 오래된 거문고를 어루만졌는데, 줄은 있어도 악보(樂譜)는 없었다. 말하기를, “나의 거문고는 천고(千古)에 전하지 않는 도연명(陶淵明)의 지취(志趣)를 얻었다.
옛날에 백아(伯牙)가 거문고를 타자 오직 종자기(鍾子期)만이 그 뜻을 알았는데, 나의 거문고는 도연명이 나오지 않으면 세상에서 알 사람이 없다.” 하였으니, 천지간의 기이한 남자라 할 것이다.
일찍이 상감 앞에서, 부처의 일을 논박하자 세조(世祖)가 거짓으로 성내기를, “이놈을 죽여서 부처에게 사례하겠다.” 하고,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명하여 칼을 가져오라 하여도 홍일동은 태연하게 변론했으며, 좌우가 거짓으로 칼로 정수리를 두 번이나 문질렀지만 돌아보지 아니하고 두려운 빛이 없었다.
세조가 장하게 여겨, “네가 술을 먹겠느냐.” 하니, 일동이 대답하기를, “번쾌(樊噲)는 한(漢) 나라 무사(武士)이며, 항왕(項王.항우)은 다른 나라의 군주였는데도 항왕이 주는 한 동이 술과 돼지다리 하나를 사양치 않았는데, 하물며 성상께서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하였다.
은 항아리에 술을 가득히 담아 내려주었는데 그는 힘차게 마셨다.
상감이 이르기를,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하니, 홍일동이 대답하기를, “죽는 것이 마땅하면 죽고, 사는 것이 마땅하면 사는 것인데, 감히 죽고 사는 것으로써 그 마음을 바꾸겠습니까.” 하니, 상감이 기뻐하여 초구(貂裘, 담비 가죽으로 지은 옷) 한 벌을 주어서 위로하였다.
- 필원잡기(筆苑雜記), 서거정(徐居正 1420~1488)